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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NOVEL

순정

[왕의 총애와 가짜 신부]무사히 책무를 다하면 널 집에 돌려보내 주겠다.

히자키 유우(Yuu Hizaki)

정략결혼을 회피하기 위해 짐을 싸들고 궁전에서 가출한 그녀였지만, 가출한 지 채 이틀도 되지 않아 이웃나라로 납치를 당하게 되는데! 에스테아의 젊은 왕 엘론드는 납치의 피해자가 된 그녀에게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만 가짜 왕비 행세를 해달라는 황당한 제안을 한다. …

본문

정략결혼을 회피하기 위해 짐을 싸들고 궁전에서 가출한 그녀였지만, 가출한 지 채 이틀도 되지 않아 이웃나라로 납치를 당하게 되는데!
에스테아의 젊은 왕 엘론드는 납치의 피해자가 된 그녀에게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만 가짜 왕비 행세를 해달라는 황당한 제안을 한다.

--------------------------- 본문 중에서 ---------------------------

“고트 국왕이 혼약을 청했다. 너도 슬슬 결혼을 생각할 나이지. 메르아, 네가 가거라.”

그날 아바마마에게 불려간 나는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고트 국왕?
예전에 파티에서 봤던 얼굴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아바마마보다 나이가 많고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아바마마에게 알랑거리며 술만 퍼마시던 인간이라 내심 언짢게 여기고 있었다. 되도록 가까이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다.
그런데 그 노인네를 내 남편으로?

“싫습니다.”

딱 잘라 거절한 나를 아바마마가 흘깃 쳐다봤다.

“막내공주라고 너무 어리광을 받아줬던 모양이구나. 왕족의 결혼은 개인의 의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혼약은 일주일 후에 발표하겠다.”
“하지만……!”
“이건 명령이다.”

평소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던 인자한 아바마마다. 그러나 이때만은 왕의 위엄을 담아 단 한 마디, “물러가라.”라고 명했을 뿐이었다.
왕의 명령은 내가 뭐라 하든 다시 뒤집히지 않는다.
그것이 공식적인 발표라면 더욱.
즉, 내 운명은 이때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태어난 나라를 등지고 주정뱅이 노인네의 처가 된다는 최악의 형태로…….

* * *

대국 로웰에는 세 왕자와 다섯 공주가 있었다.
그리고 난 그 다섯 번째 공주다.
어릴 때부터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자랐지만, 왕의 딸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고 선언당한 기분이었다.

“가엾은 우리 공주님.”

방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전하자, 어릴 적부터 함께였던 시녀 미아는 깜짝 놀라 눈물을 떨구며 한탄했다.

“고트라면 북쪽의 소국이잖아요? 왜 공주님께서 그런 곳에. 게다가 상대가 노인 같은 왕이라뇨.”
“‘같은’이 아냐, 미아, 노인 맞아.”

대답하자 다시 기분이 울적해진다.
아바마마의 속내는 잘 알고 있었다.
부친으로서 딸을 아무리 예뻐한들, 왕의 입장에서 보면 딸은 유력자와의 연을 잇는 중요한 도구다.
하지만 난 고작 도구로 끝나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줄곧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공주의 소양은 물론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역사나 경제도 배웠다.
장래에 국내에서 오라버니의 힘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를 고트 같은 소국으로 시집보내려 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로웰은 동쪽에 바다가 있는 나라로, 4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쪽으로부터 톨, 카리아, 에스테아, 총 3개국이다.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 카리아는 영토로 흐르는 강을 주요 소득으로 삼았고, 그 강이 로웰을 통해 바다로 흐른다는 입지 관계상 우리 나라와의 관계가 양호했다.
남쪽 에스테아는 선대 왕이 승하하고 젊은 왕자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선왕은 여자를 대할 때 자유분방한 타입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를 남기고 죽었다.
정확히 말해, 애첩을 늘리는 일에 매달려 정치를 등한시하고 귀족의 힘이 커지는 데 일조하였으며, 애첩의 아이들, 즉 왕위를 노리는 현왕의 형제들을 잔뜩 남겼다는 소리다.
에스테아는 결코 나쁜 나라가 아니지만 당분간은 소란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톨이다.
북쪽 톨은 국경을 둘러싸고 아바마마와 몇 번인가 작은 다툼을 벌였고, 매번 우리가 패배했다.
북쪽 나라는 추위로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아 어떻게든 남쪽의 토지를 손에 넣으려 했지만, 아바마마에게 가로막혀 뜻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트는 그런 톨의 맞은편에 있는 나라로, 만약 두 나라가 손을 잡으면 좀 귀찮아진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전에 나를 고트로 시집보내고, 함께 힘을 합쳐 톨을 궁지에 몰려는 심산이겠지.

“굳이 날 보내지 않아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이를테면 해상무역에서 정기적인 루트를 만들어 준다거나, 식량을 지원해줄 테니 동맹을 맺자고 꼬드기거나. 그런데 아바마마는 날 희생양으로 삼았어.”

분노에 차 쿠션을 집어 던지자, 미아가 그것을 주워 먼지를 털었다.

“물건에 화풀이하시면 안 돼요.”

그녀가 매일 깨끗이 청소하는 이 방에 먼지가 어디 있다고.

“전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정식 혼약이 일주일 뒤라면 폐하께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무리야. 저 고집불통 아버지께선 왕의 결정을 번복하는 일을 수치로 여기시는걸.”
“어머나, 폐하께 고집불통 아버지라뇨.”
“내 말이 못됐다는 건 알아, 하지만 오늘만은 그렇게 말하고 싶네. 왜냐면 내 자질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도구로 치부하잖아? 만약 날 오라버니의 책사로 두면 거뜬히 잘해낼 텐데.”

자만심이 아니다.
어째서인지 나의 세 오라버니는 모두 마음이 약하고 착해서, 형제자매 중에는 내가 제일 드센 편이었다.

“하긴, 크로우리 님이 국왕으로 즉위하시면 공주님이 옆에서 잘 잡아드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

내가 바로 그거라는 듯 미아를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건 그에 걸맞은 재상을 두거나 똑 부러지는 아내를 맞이하면 될 일이에요. 공주님께서도 예쁜 신부가…….”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예쁜 신부가 되긴 글렀다는 이야기 도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나…… 가출할까?”
“네에……?”
“가출 말이야. 이대로 성에 있으면 시집가게 된다고. 하지만 내가 사라지면 혼약이나 결혼이나 불가능하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저기, 미아. 너희 집에 날 좀 숨겨주지 않을래?”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그럴 수가, 무서운 일이에요. 그런 짓을 하면 저희 일가는 공주님 유괴라는 대역죄로 전원 참수를 당할 거예요.”
“……그렇구나. 게다가 너희 집에 있으면 금세 들켜버리겠지.”
“폐하께 서한을 보내면 어떨까요? 대화할 시간은 없더라도 서한이라면 읽어주실지도요. 아니면 크로우리 왕자님께 간청해 보세요. 공주님을 무척 귀여워하시잖아요.”

그녀의 말마따나 후계자로 갑갑하게 자란 오라버니는 자유로운 나를 부러워하며 매우 예뻐했다.
그렇지만 오라버니가 과연 날 위해 아바마마와 싸워줄까?

“……알았어. 오늘 밤에 두 사람한테 서한을 쓸게, 이제 나가도 좋아.”
“식사는요?”
“방에서 먹을게. 다른 사람들에겐 몸 상태가 나빠서 그렇다고 전해줘. 그러면 내가 이 혼담을 싫어한다는 의사를 조금은 나타낼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미아는 아직 껴안고 있던 쿠션을 소파에 내려놓고, 깊이 머리를 숙인 뒤 방을 나갔다.

“정말…….”

혼자가 되자 새삼 화가 들끓었다.
거울에 비춰볼 것도 없이 난 자신의 외모를 자부하고 있었다.
요염할 정도로 아름다운 어마마마보다는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옅은 녹색 눈동자에 구불거림 한 점 없이 쭉 뻗은 금색 머리카락. 오똑한 코도 작은 입술도 남들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도구로 쓴다고 해도 난 더 근사한 상대를 고를 자격이 있다.
그런데 아바마마는 귀찮다는 이유로, 그 노인을 회유하는 데 가장 간편한 수단으로밖에 날 보지 않았다.
공주의 방이라기엔 이질적일 정도로 벽에 빼곡한 책장.
이걸 단 한 번이라도 봤으면 내 진심을 알아주셨을 텐데.
결혼 상대가 노인이라서 싫은 게 아니다. 내가 아바마마에게 ‘싸구려’로 취급당했다는 것이 분했다.
나라면 더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구석의 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좋아하는 흰 깃털 펜을 들고, 아바마마에게 서한을 쓰기 위해서.
저는 장래 오라버니를 돕고 싶습니다. 정 어렵다면 이 나라를 위해 힘쓰는 자의 아내라도 좋습니다. 한시적인 인질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생각해 주십시오.
거기까지 단숨에 써내려간 나는 종이를 구깃구깃 접어서 버렸다.
이런 글을 써봤자 왕의 결정을 번복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아바마마는 눈으로 직접 본 것밖에 믿지 않으니까. 왕으로서 타당한 방식이지만, 딸이 상대하기엔 성가신 부분이 있다.
기회를 얻으면 아바마마의 눈앞에서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아바마마가 내게 기회를 줄지, 주지 않을지다.

“……무리야.”

아바마마는 날 귀여워한다. 사랑하고 있기도 하겠지. 그러나 오라버니들처럼 국정을 도울 만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부분은 파티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일과 이렇게 나라를 위해 시집보내는 것뿐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것도 임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 능력이 너무 아깝잖아.
아바마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마마마가 그런 분이니까.
어마마마는 아바마마의 두 번째 비다.
첫 번째 비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혼인한 것이다.
왕비인 어마마마는 결코 정무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으로 아바마마를 즐겁게 하고, 곁에서 외교를 도왔다.
첫 번째 비는 세 공주만을 낳았다.
하지만 어마마마는 그 공주들을 차별 없이 사랑했고, 왕자 셋을 포함해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아 국모로서의 역할도 완수했다.
온화하고 소극적인 어마마마.
아바마마는 분명 어마마마를 이상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나는 다르다.
마을에서는 여자들도 생업에 종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내에서도 미아를 비롯한 여자들이 열심히 일한다. 그녀들의 존재 덕택에 모든 일이 막힘 없이 돌아가고 있다.
만약 그녀들이 손을 놓으면 성은 금세 먼지투성이가 되고, 끼니도 내 손으로 조달해야 할 거다.
아바마마에게는 이런 상상력이 없는 거다.
일전에 미아가 말하길, 거리에서는 여자들이 구운 빵과 옷, 그 외의 것들로 장사를 하고 학교 교사 중에도 여자가 있다고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여성이 주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절반 정도는 돕고 있을 터다.
그런데 아바마마는 날 어린애 다루듯 고트에 시집보내겠다니.

“……내가 마을에 태어났으면 틀림없이 내 손으로 벌어서 살았을 거야. 학교 선생님도 좋고, 물건을 팔아도 되지. 분명 뭐라도 했을 거라고.”

내가 마을에 태어났으면…….
오라버니에게 보낼 서한을 쓰던 손이 멈칫, 굳었다.
성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할지도 몰라, 아름다운 드레스도 더 입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런 게 없어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먹고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럴 자금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족은 돈을 소지하고 있지 않지만, 난 오라버니의 지방 시찰에 동행한 적이 있어서 그때 쇼핑하던 용돈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잘 될 거야.
생각하자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일주일이나 기다릴 필요 있나?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테다.
그리고 내 힘으로 살아갈 정도로 유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아바마마도 날 다시 보고 다른 곳에 써주실 거야.
새 종이를 꺼낸 나는 열심히 펜을 움직였다.
지금 막 떠오른 묘안을 글로 적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바마마.
저는 저를 고트에 시집보낸다는 아바마마의 결정에 승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결혼이 왕족의 의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혼인이 그 의무에 상응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고트와의 동맹은 저라는 인질 한 사람으로 두터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시집간 뒤 고트와 톨이 손을 잡으면 저는 그들의 인질이 되고 말겠지요.
고트 왕은 신용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며, 그런 의미로도 저는 그 사람과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항로를 열어 무역을 확약하는 조건으로 동맹을 제안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물론 아바마마께서는 보급 항구를 톨에 두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톨의 건너편에 있는 작은 섬이 그 문제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이전 왕궁에 드나들던 상인이 말하길, 그곳은 자치령으로, 외양에 고기잡이를 나가는 배를 위해 작지만 번듯한 항구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곳과 먼저 동맹을 맺어 항로를 뚫으면 고트는 분명 기꺼워할 것입니다.
아니, 이런 말씀을 드리고자 펜을 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 부족한 제안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존재할 터입니다.
그러니 저는 성을 나가겠습니다.
제가 이 결혼보다도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아바마마께 증명하기 위해.
맹세컨대 이러한 저의 꿍꿍이와 미아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그녀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
경애하는 아바마마께서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우선 글로 적어 둡니다.
부디 저를 찾지 마십시오.
언젠가 떳떳한 일자리를 갖게 된다면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날을 기대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마마마와 형제자매들에게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럼 다시 만날 그날을 고대하며…….

당신의 딸, 메르아 올림.」

서한을 책상 위에 두고, 나는 가장 수수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작은 가방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담았다.
가져가고 싶은 물건은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계산했다.
방에 남아있던 돈과 작은 금세공, 황금으로 된 단추들을 작은 꾸러미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자리가 얼른 구해지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워질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장이 새겨진 반지도 챙겼다.
언젠가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문지기가 날 못 알아보고 들여보내지 않으면 난처할 테니까.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건 작은 주머니에 넣고 속옷에 핀으로 고정했다.
내 사인을 메모에 써서 그것도 주머니에 넣었다. 이건 따로 쓸 데가 있으니까.
철저히 준비한 뒤 방에서 저녁을 먹고, 나는 창문으로 방을 슬쩍 빠져나가 그대로 궁에 인접한 주방 쪽으로 향했다.
주방은 사람의 출입이 잦아서 성 밖으로 나가기 쉬운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한동안 고구마 술통 그림자에 숨어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주방에 걸려 있던 앞치마를 걸치고 모자로 금발을 숨긴 뒤 문에 접근하자 예상대로 문지기가 가로막았다.

“이런 한밤중에 뭘 하는 거냐.”

문지기는 내 얼굴을 모르고, 방을 나서면서 얼굴에 주근깨를 찍어두긴 했지만 조금 두근거렸다.
이때를 위해 써둔 메모를 꺼내면서도 손이 떨렸다.

“네, 메르아 공주님께서 은밀히 사오라는 물건이 있어서…….”

왕가의 문장이 찍힌 편지지와 내 사인.
당연히 진짜 메모를 보고 문지기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 메모는 가져가라. 돌아올 때도 그걸 보여주도록.”

주의를 준다.
이건 칭찬해 줘야겠는걸.
이 일이 밝혀지면 호되게 혼이 날지도 모르지만…….
문을 나가 그대로 달려갔다.
누군가가 괜한 변덕으로 내 침대를 엿본다 한들, 거기에는 이불로 만든 가짜 내가 잠들어 있다. 하지만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을 테니, 이불을 들춰버리면 금세 들통날 것이다.
추격자가 따라붙기 전에 어디든 멀리 가야 한다.
마을의 위험장소는 알고 있었다.
마차로 나갈 때마다 반드시 지나지 않았던 길이 있었으니까.
에레아 거리가 좋겠다.
그곳은 나도 마차로 자주 다녔고, 왕실이 보증하는 가게도 있는걸. 밤에도 위험성은 적을 터다.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이 있다면, 내가 마을로 나갈 땐 늘 마차를 탔지만 오늘은 직접 걸어간다는 것이었다.

“……멀어.”

작은 가방을 들고 오길 잘했다.
괜한 욕심으로 큰 가방을 가져왔으면 아마 더 걷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래도 에레아 거리는 멀었다.
별 수 없이 나는 처음 눈에 띈 여관 불빛으로 다가가 안을 엿봤다.
작지만 청결해 보이는 여관.
음, 이상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 발로 걸어서 올만큼 왕성과 가까우니 수상한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룻밤 묵고 싶은데, 방 있어요?”

카운터에 선 여관 주인이 나를 빤히 보더니 방긋 웃었다.

“숙박비는 선불인데요, 괜찮으십니까?”
“네.”
“혼자 오셨나요?”
“나중에 일행인 남자가 올지도 몰라요.”

이런 거짓말을 할 꾀도 있단 말이야, 난.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에 성함을.”

숙박비를 내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가명을 생각 못했네…….
이렇게 성과 가까운 곳에서 공주와 같은 이름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끌면 의심하겠지.
어쩔 수 없이 큰어머니의 이름을 쓰기로 했다.
아레나 레긴스.
성은 내 말을 돌보는 시종의 것을 땄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고마워요, 아까 먹었어요.”

주인과 대화하고 있는데 그때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방 있나?”

크고 다부진 체격의 남성이다. 그런데 언행은 좋지 않아 보인다.

“있습니다. 몇 분이시죠?”
“세 명. 마차도 있네만.”
“그럼 뒤쪽으로 오시죠. 말에게 먹일 물과 마른 풀이 필요하시면 그 요금도 지불하시겠습니까?”
“아아, 부탁하네. 그런데 주인장, 이 근방에서 가정교사를 할만한 평민 처녀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되나?”

사내가 질문하며 숙박부에 사인하는데 그의 일행 같은 남자가 들어왔다.
이쪽은 성실한 관리 같은 분위기의 남자였다.

“그러시군요. 요 앞에 중개업소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시죠. 그런데 젊은 사람은 구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관리 같은 남자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아까의 남자는 딱딱한 느낌이었는데, 이쪽은 기품 있고 잘생긴 얼굴이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뇨, 나중에 일행이 올 거예요.”
“그런가요. 그거 다행이군요. 여인 혼자 다니긴 위험한 세상이니까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쪽도 나쁜 사람은 아닌 듯하다.

“여행을 오셨나요?”
“아뇨……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얼른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여관 주인은 새 손님과 이야기하기 바빠 내게 열쇠 주는 것을 잊은 듯했다.
어쩔 수 없이 관리 같은 남자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거리가 멉니까?”
“에에, 뭐. ……시골이에요.”
“실례지만 이쪽엔 일을 하러 오신 건가요?”
“가……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고용주가 이사를 간다고 해서, 저도 여유가 생겼으니 이제 돌아갈까 하고요.”

아까 막 귀에 들어온 단어를 사용한 것이 실수였다.
관리 같은 남자뿐 아니라 여관 주인과 이야기하던 남자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가씨, 가정교사였습니까?”
“네? 네에…… 하지만 무척 어린 아이였으니까 가정교사라기보다 놀이 상대 같은…….”
“고향에 돌아간다면 지금은 일자리가 없다는 말씀이죠?”
“아뇨. 그게…… 어쩌면 생길지도 몰라요. 새 고용주가 절 데리러 올지도 모르거든요.”

의외다.
나, 거짓말을 꽤 잘하는구나.

“그런가요. 정말 유감이군요. 저희도 가정교사를 찾고 있어서요.”
“안타깝네요. 저어, 제 방 열쇠 좀.”

두 사람의 신경이 나한테 쏠려 대화가 끊기자 잽싸게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오오, 그러고 보니. 2층 왼쪽입니다. 안에서도 잠글 수 있어요.”
“고마워요.”

열쇠를 받아 들고 난 허둥지둥 계단을 올랐다.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한 데다 거짓말까지 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도 제법 잘한 것 같은데.

“왼쪽 방…… 여기구나.”

열쇠 번호와 문에 붙은 번호를 확인하고 안에 들어간다.
방은 아주 작고 좁았다.
침대 하나, 테이블 하나, 곁방은 없다.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 묵는 ‘여관’이라는 것에 매우 흥분되었다.
창을 열고 밖을 확인했지만, 추격자 같은 그림자는 없다.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거겠지.

“내일은 마차에 합승해서 수도를 벗어나자. 테드나 거리에는 큰 대학이 있으니까 내 또래인 사람들도 엄청 많을 거야, 치안도 좋고.”

아바마마의 바른 치세 덕에 이렇게 안심하고 밤거리를 쏘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제 힘을 시험해보고 싶어요.
그러니 부디 절 찾지 마세요.
잠옷을 챙겨오지도 않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나는 옷을 입은 채 침대로 파고들었다.
새 인생의 기념비적인 첫날밤이라고 감격하면서…….

* * *

이튿날 아침, 나는 몸이 쑤시는 아픔에 눈을 떴다.
옷을 입은 채 딱딱한 침대에서 잔 탓에 노곤한 피로를 느꼈다.
스트레칭을 한 뒤 주변을 돌아본다.
장식 없는 가구. 그런 가구조차 많지 않다.
하지만 분명히 이게 일반적인 방이겠지.
‘좁다’거나 ‘부족하다’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약간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레 펴고 머리를 눈에 띄지 않게 따서 묶었다.
조식은…… 직접 가지러 가야 하나? 방에 짐을 그대로 둬도 괜찮을까? 아니면 누가 날 부르러 오나?
고민한 끝에 나는 문을 잠그고 나가보기로 했다.
작은 주머니에 돈만 넣어서, 가방은 방 안에 뒀다.

“안녕하세요.”

여관 주인은 없고 대신 중년 여성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어, 식사는?”
“아아, 저희 여관에서 드시려면 저곳이 식당이거든요. 손님은 조식을 추가 요청하지 않으셨으니, 드시려면 먼저 돈을 지불하셔야 해요.”
“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이곳을 나가면 어디서 식사해야 될지 알 수 없었기에, 우선 먹어두기로 했다.
식당에는 작은 테이블이 여럿 놓여 있었고 각각 손님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은 원형이었는데, 단골 손님이나 좋은 자리는 따로 없는 듯했다. 다행스럽게도 손님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 혼자 먹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지만.

“아가씨.”

뒤를 돌아보니 어제의 그 관리 같은 남자가 날 보고 손을 들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일행이 안 오셨나 봐요.”
“에?”
“아니, 오늘도 혼자라서요. 아니면 오늘 오십니까?”
“아…… 네에. 글쎄요. 오면 좋을 텐데…….”

그가 의자를 빼서 이쪽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언제까지나 요리 접시를 들고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 감사히 합석하기로 했다.
테이블에는 그 덩치 큰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마부로 보이는 노인도.
그들의 접시에는 아침부터 고기가 놓여 있다. 역시 사내들이구나.
난 가볍게 기도한 뒤 식사에 손을 댔다.

“이대로 일행이 안 오면, 정말 시골로 돌아갈 겁니까?”
“네?”
“어제 그렇게 말씀하셔서요.”
“아아. 에에, 뭐…….”

그랬다. 내가 한 거짓말은 기억해야지. 난 어린이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었고, 일이 끝나서 시골에 돌아갈 예정이었어.

“도회 생활은 즐거우셨죠?”
“네에.”

아직 겪어보지도 못했지만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우리가 있는 곳에서 일해보지 않을래요?”
“저희는 어제 막 만났을 뿐인데요, 왜 그렇게 열심히 권하시는 건가요?”
“우리가 구하는 사람에겐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태도에 기품이 있을 것, 언행에도 문제가 없고 귀족이 아닐 것. 동반인도 없이 걷고 있는 걸 보니, 귀족은 아니시죠?”
“아니에요.”
“좋아요. 그리고 우린 매우 급합니다. 만약 아가씨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준다면 훨씬 수고를 덜 수 있죠.”
“가정교사, 맞나요?”
“비슷한 겁니다.”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다.
나처럼 젊은 사람을 찾는다면 분명히 상대는 작은 어린아이일 것이다.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돈을 받는다, 괜찮을지도 모른다. 가정교사는 보통 한집에 머무르게 해서 고용하는 일이 많다. 그렇다면 머물 곳도 걱정 없겠지.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라는 점이 약간 걸렸지만,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온 순간 나는 마음을 정했다.

“진짜라니까, 이 앞 여관에 병사들이 조사하러 들이닥쳤다고. 분명히 무슨 사건이 벌어진 게지.”

여관 조사.
눈치챘구나.

“알겠습니다. 일행도 오지 않으니 제안해주신 일을 받아들일게요.”
“잘 됐군요.”
“당장 그쪽으로 갈까요. 우물쭈물하다간 먼저 계약했던 분이 찾아올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면 이중 계약이 되잖아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식사를 마치고 바로 출발할까요?”
“좋아요.”

서둘러야 된다.
기껏 도망쳤는데, 딱딱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자마자 도로 끌려간다면 달아난 의미가 없어진다.
나는 허겁지겁 수프와 빵을 먹어치우고, 구운 과자는 손수건에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가방을 가져올게요. 뒷문에 있는 마구간에서 기다려 주세요.”
“마차를 정문으로 옮길까요?”
“아뇨. 저희 말고도 출발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번잡하기만 할 거예요. 뒷문에서 봬요.”

현관까지 와서 병사와 맞닥뜨리면 큰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구간의 마차 앞에서 기다리지요. 저희가 탄 것은 검은색으로 칠한 마차입니다.”
“네. 금방 갈게요.”

신은 분명 내 편이야.
추격자가 들이닥치기도 전에 소식을 알았고, 착실해 보이는 사람에게 번듯한 일자리도 얻었어.
이제 그들이 악인이 아니기만을 빌자.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 뒷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현관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잠깐 조사 좀 하지.”

추격자다.
나는 대뜸 옆에 있던 여종의 손을 잡았다.

“숙박비는 이미 냈고, 지금 출발한다고 주인에게 전해줘요. 걱정을 끼쳤지만, 이제 일행이 와서 혼자가 아니라고요.”

그녀는 왜 자기한테 그런 소리를 하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네.”라며 수긍했다.
이제 됐다.
그들은 분명 혼자 여행하는 여성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언으로 나는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 아니게 되어 추격자의 법망을 벗어날 수 있다.
누구와 가는지 밝히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남긴 숙박부의 내용을 통해 뒤를 밟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뒷문으로 나가 마구간에 가자, 그곳에는 근사한 말이 이끄는 검은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마차에는 장식이 없었지만 고급스러웠고, 말은 왕궁 마구간에 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준마였다.
틀림없이 지방의 돈 많은 귀족일 거야. 아이는 병약하거나, 가정교사를 몇 명이나 내쫓았을 법한 개구쟁이겠지.

“기다리셨죠. 짐을 챙겨 왔어요.”
“어서 타십시오. 왠지 밖이 소란스럽군요. 성가신 일에는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요.”

바라던 바다.

“알겠어요.”

열린 마차에 올라타니, 내부는 심홍색에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럼갈까요. 아아, 성함이?”
“아레나 레긴스예요. 당신은……?”

새삼 묻기도 이상한 내용이었다.

“전 테리라고 합니다. 이쪽은 가이, 마부는 슬라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갑시다. 제 주인이 있는 곳까지 조금 긴 여행이 되겠지만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마차 여행은 익숙하니까 염려 마세요.”

마부가 채찍질을 한 번 하자,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흘끔 내다본 창밖, 여관 앞에 여러 병사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여자 한 명만 찾는 모양인지 마차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이건 모험이야.
익숙한 왕성을 지나친다.
내 성이 멀어져 간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일할 거야. 일단 가정교사부터. 그리고 언젠가 큰 공을 세워서 반드시 돌아오겠어. 그때까지 안녕히.

“남자들만 있는 자리라 불편하시죠. 당분간 느긋이 쉬십시오. 창문은 열어도 상관없습니다만 얼굴은 내밀지 마시길.”
“네.”

창밖을 내다보며 난 지방의 작은 귀족 여자아이를 상상했다. 지금껏 내가 제일 막내였으니 여동생이 생기면 좋겠는데.
만약 남자아이라도 꼭 친해지고 말 테다.
아아, 그런데 가정교사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뭘 하지? 그것도 생각해 둬야겠다.
돌바닥 위를 달리는 마차의 규칙적인 진동에 몸을 맡기고, 애태우고 있을 미아를 생각했다. 부디 그녀에게 아무 피해도 없기를.
그리고 소중한 가족, 어마마마와 형제자매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 * *

테리 씨는 내가 편히 쉬지 못할까봐 말을 걸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으니 꽤 지루했다.
게다가 어젯밤에 푹 자지도 못했기에, 나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 마차가 아직 달리고 있었고, 점심식사라는 바구니를 건네 받았다.

“내려서 먹을까 했지만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요.”

그 말에 심히 부끄러웠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받은 음식을 입에 넣는 와중에도 마차는 내내 달렸다.

“저…… 아직 멀었나요?”

그렇게 묻자 그는 “시골이거든요.”라며 웃는다.

“아아, 젊은 아가씨가 탄 모습을 보면 좋지 못한 자들이 눈여겨볼 수 있어서요. 슬슬 창을 닫아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말을 듣자 돌연 불안감이 스쳤다.
다 잘 될 거라고 믿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정말일까?
왜 이들은 곧 도착할 저택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지?
나를 교사로 고용한다면 내가 뭘 가르칠 수 있는지 정도는 물어야 되잖아?
게다가 관리 같은 테리 씨는 그렇다 쳐도, 왜 가정교사를 수소문하는 데 병사 같은 가이 씨를 동반한 걸까?
설마, 나 납치당하고 있는 거……?
아니, 그럴 리 없다.
만약 유괴라면 지금쯤 묶이거나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었을 테니까. 게다가 이 마차는 유괴범이 탈 정도로 값싼 마차가 아니야.
아마 이들은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를 뿐이겠지. 그래서 말수도 적은 거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날이 저물고 어두컴컴해져도 마차는 달렸다.

“말을 바꾸고 올 테니, 그동안 식사를 하세요.”

마차에서 내린 나는 어느새 아침과 다른 말들이 매여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내가 잠든 틈에, 아마 점심을 조달할 때 한 번 바꾼 것이겠지.
그리고 식사는 이번에도 바구니에 들어있는 것을 마차 안에서 먹는 형태였다. 음식도 밖에서 조달한 듯하다.
게다가.

“곧 도착할 테니 눈을 가려 주시겠습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눈을 가린…… 다고요? 어째서요?”
“보안상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 거기서 일하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뭘 보든…….”

방금 분명히 ‘아, 그랬지.’라는 표정을 지은 주제에, 테리 씨가 씩 웃었다.

“아직 정식으로 고용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상하다.

“그런 얼굴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성실해 보이는 인상은 빙그레 웃으면 웃을수록 수상쩍다는 것을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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